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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선생

다산 정약용선생의 친가의 가풍(家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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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선생은 나주 정씨 가문입니다.

그 유래와 시조가 어디서부터 시작했냐면,

13대조의 위에 계셨던 정윤종(丁允宗)선생을 들 수 있습니다.


정윤종 선생은 고려유민으로 당시 조선왕조가 개국을 하자

황해도 배천(백천이라고도 함, 白川)땅에 은거하여 

조용하고도 당시의 지역사회에서 남은 돕는 덕을 쌓으면서

조금씩 집안을 일으키는 기반을 닦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정윤종 선생의 아들 정자급(丁子伋)선생 때부터

벼슬길에 나서기 시작했으며 서울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이후로 5대조인 정시윤(丁時潤)선생에 이르기까지 , 

정약용선생의 직계선조는 8대가 잇달아 옥당(玉堂)에 오르게 되서

대대로 학자들이 배출되는 명예로운 가문으로 인정받기에 이릅니다.


<정약용 선생의 생가인 경기도 남양주시 능내리의 여유당 입구>


특히 정약용 선생의 5대조인 정시윤선생은 조선 숙종때의 분이신데, 당시의 치열한 당파싸움 속에서 

당파에 초연하여 지조를 지켰으며 만년에는 마재(馬峴,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재,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터를 잡게 됩니다.



이때부터 정약용 선생의 고조부,조부에 이르는 선조들은 벼슬길에 전혀 나가지 못하고 여기 마재 땅에 묻혀 살게 됩니다.

그의 부친이었던 정재원선생의 때에 이르러 다시 벼슬길에 나가게 됩니다.


<정약용 선생의 집이자 유배에서 풀려난 뒤, 학문교육과 교류의 장이었던 여유당>


정약용 선생은 앞서의 자신의 집안 내력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고,

그 집안의 가풍(家風)을 네 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1. 삼가함

그의 가문의 역사에서도 많은 국난과 나라의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 때 순국을 한다든지, 더욱 큰 우국충정의 부분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비리를 저지르거나 주류세력에 추종하는 일이 없었음을 밝혔습니다.


2. 서툴음

정약용 선생의 선조들은 당시의 권력에 대해 중심적으로 차지하고 경쟁에 나서는 일이 아니라,

멀리 염려하여 한 발 물러서서 그 속을 굳게 지켰음을 밝혔습니다.


3. 착함

대대로 정약용 선생의 집안 사람들은 독기가 없었으며, 남을 향한 원망을 하거나 보복함이 없었습니다.


4. 신실함

그의 친족들은 허황된 말을 하지 않았고, 믿음직하며 진실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집의 가풍은 무엇인가.....한 번 찾아보시죠

그리고 내 삶의 표어나 가치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이 연말의 시간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P.S : 그리고

정약용 선생의 직계 6대 후손인 배우겸 모델 정해인씨를 우리는 요즘 계속 보고 있습니다~^^


  

참고서적 : 다산 평전(백성을 사랑한 지성) - 금장태지음, 지식과교양

            다산 정약용 평전 - 박석무 지음, 민음사

            다산학 공부 - 김수경, 김언종외 공저, 돌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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