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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선생

다산 정약용의 즐거움과 괴로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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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에게 있어서

즐거움과 괴로움, 즉 기쁨과 슬픔의 부분은 

연속적으로 교차된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꼭 다산 선생뿐만 아니라, 저를 비롯한 모두에게 있어서

즐거움과 괴로움, 기쁨, 슬픔은 인생 전체에서 교차하는 것이고

언제든지 자기 자신에게 찾아오는 부분이 되겠죠.


그렇기에 옛말에서부터

"슬픔은 기쁨의 씨앗이요, 기쁨은 슬픔의 모태이다"

이런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 부분이 다산 선생에게 있어서 일찍 찾아들게 된 일이 있습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생가에 있는 다산 정약용 상>


1792년 3월 20일 - 홍문관록에 뽑힘(31세)

1792년 3월 29일 - 홍문관의 학사 벼슬인 수찬에 제수


다산은 홍문관의 수찬에 임명되자 홍문관 학사로서 수시로 경연에 들나들었습니다.


#경연 : 임금과 신하들이 함께 앉아 정치와 학문을 토론하던 자리


당시 남인의 가계에서 홍문관(옥당)에 들어간다는 자체가 심히 어려웠던 시대상황이었는데,

이전 다산 정약용 선생의 12대 할아버지때부터 5대조 정시윤(1646~1713)에 이르기까지 연속 8대가 옥당에 들어갔습니다.



정조대왕은 이런 부분을 알고 있었고 당시 정약용의 홍문관록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던 세력들이 많았는데,

"옥당은 정씨(丁氏) 가문에서 대대로 물려온 곳이니, 정약용을 뺄 수가 없지 않겠는가?"

이렇게 말한 정조대왕의 논리에 조정대신들은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계속적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은 임금을 보필하는 요직의 신하로 자리잡는 시간을 거치게 됩니다.


<남양주 다산 유적지에 있는 인자한 아버지 다산>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는 1792년 4월 9일,     

당시 진주 목사로 재직하던 다산 선생의 아버지 정재원 공(1730~1792)이 세상을 떠나는 비운을 맞이합니다.


문과에는 오르지 않고 진사과에 급제를 했으나,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 공은 경사(경학과 역사학)에 밝고 

목민관으로서의 뛰어난 자질이 있어 여러 지방에서 큰 치적을 남긴 분이기도 하셨고,

다산 정약용선생에게 있어 아버지의 존재는 큰 스승의 존재와 같았습니다.


그해 5월, 충주의 하담에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다산은 형제들과 고향 마재(현재 남양주시 능내리)에 여막을 지어서

1794년 6월까지 삼년상을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1794년 7월 23일,

정조대왕으로부터 성균관 직강(정 5품) 이라는 벼슬에 임명되게 됩니다.


<신영복 선생의 서화 에세이, 기쁨과 슬픔의 교직>


다산 정약용 선생은 일생일대에 걸쳐서 기쁨과 슬픔이 교차한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분이십니다.

어쩌면 그 부분을 젊은 시절부터 경험하고 다졌기에 후에 유배와 외로움의 삶 가운데서도 그것을 헤쳐 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


요즘 저도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는 부분이 많아서 좀 힘들었는데,

다산 정약용 선생의 부분을 읽고 생각하는 가운데서 용기와 지혜를 더욱 구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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