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냥 끄적거림~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반응형

우리가 익숙하게 들었던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의미는 오늘날 어떻게 통용되냐면,


오늘날의 사회지도층이 자신이 누리는 명예(노블리스)만큼 

도덕적 의무(오블리제)를 다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매우 준엄하고도 깊은 뜻이 있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그 유래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이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유래는 약 6~700년 전의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백년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상황 가운데,

프랑스의 "깔레"시는 끝까지 영국에 저항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구원병이 도통 오지를 않지요.


결국 "깔레"시는 영국에 항복을 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합니다.


당시 영국의 왕 에드워드3세는 저항에 대한 책임으로 

깔레시민 여섯 명의 처형을 요구합니다.



<영국의 왕 에드워드3세 Edward III, 1312년 11월13일 ~ 1377년 6월 21일 >


이 때 제일 먼저 나선 사람이 당시 깔레 시의 부자였던 "유스타슈 생 피에르"가 선뜻 나섰고,

다음으로 당시 깔레 시의 시장이었던 "장데르",

그 다음으로는 상인이었던 "피에르 드 위쌍" 이렇게  세 명이 먼저 나서게 됩니다(3/6)


그런데 여기서 "페이르 드 위쌍"의 아들이 아버지의 길을 따른다고 자원하게 되고(4/6)

여기에 깔레시의 시민 3명이 자원을 하게되서 총 7명이 처형을 받겠다고 자원합니다(7/6)


그런데 여기서 제일 먼저 자원을 했던 "유스타슈 생 피에르"가 제안을 하기를,

다음날 아침 처형장에 제일 늦게 나오는 자를 빼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처형장에는 "유스타슈"를 뺀 6명이 모였습니다.

그들을 포함한 깔레시의 시민들이 "유스타슈"의 집으로 가서 보니  

이미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이 됩니다.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으면 순교자들의 사기가 저하될 것을 우려해서 

자신이 먼저 죽음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이 상황이 이해가 되시는지요, 정말 놀라운 일이죠)


이제 당시 영국의 에드워드3세 왕의 왕비(에노의 필리파)가 이에 크게 감동해서

"깔레"시민에게 자비를 베풀어줄 것을 왕에게 간청합니다.

당시 왕비는 임신중이기도 했는데, 에드워드3세는 왕비의 간청을 받아들여서

처형을 취소하게 됩니다.



그 이후, "깔레"는 "노블리스(귀족) 오블리제(의무)"라는 단어의 상징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몆백년이 지나서 "깔레"시의 요청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생각하는 사람"의 조각가 로댕이

10년의 작업 긑에 "깔레의 시민"을 완성하게 됩니다.


<프랑스 깔레시에 있는 "깔레의 시민" 동상>


오늘날 제가 이런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이런 사회지도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볼 수 있을까요?


온갖 쏟아지는 사회적 이슈와 뉴스들 가운데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꿈은 아직도 저 멀리 있는 것 같습니다.


P.S : 우리시대의 아픔을 짊어지신 백남기 농민을 추모합니다~ ▶◀


#여러분의 "공감"과 "댓글" 그리고 SNS "공유"는 저의 블로그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신답니다
(공감은 로그인을 안하셔도 가능합니다^^) 

#이 블로그는 구글-크롬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http://www.google.co.kr/chrome/)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