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itude(고독)
만일 스스로의 창창한 가능성과 능력,
그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부 다 빼앗기고 나락으로 떨어졌다면?
본인이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모함이 계속되고 심지어 죽음의 위협까지 도사린 상황에서
자기를 도와줄 이가 아무도 없는 상황 가운데 18년 동안을 살아가야 한다면?
그리고 그 가운데서 약 500여권 이상의 책을 저술하는 학문과 삶에 대한 가치를 집중할 수 있다면?
저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집념과 학문에의 열정을 보이시고,
무엇보다 너무나 외롭고 궁핍한 오랜 유배기간이 오히려 후세의 위대한 본보기가 된 인물,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丁若鏞, 1762년 8월 5일(음력 6월 16일) ~ 1836년 4월 7일(음력 2월 22일)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초상화>
<다산 정약용 선생의 동상-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한 생가 여유당에서>
수많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업적이 있습니다.
전 그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하고 집중하는 것은, 정약용 선생의 고독에 대한 가치였습니다.
정약용 선생은 나이 마흔 살에 전남 강진으로 유배됐습니다.(1801~2년부터 18년간)
눈앞이 캄캄할 정도로 막막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는데요, 정말 개혁군주 정조대왕시대의
잘 나가던 엘리트 관료에서 하루아침에 천주교와 관련된 대역무도 죄인으로 덧씌워져서,
어느 누구도 눈길 조차 주지않고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
천주교 동료들을 밀고함으로서 구차한 목숨을 부지했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유배상태에서의 무기력이 당시 정약용 선생에게는 그마나 남아있던
마지막의 희망들 마저 모조리 상실되고 거의 살아야 할 이유가 없을 정도의 환경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선생의 전성기는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이 됩니다.
<강진 다산초당>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장장 18년에 걸친 강진 귀양살이 가운데 10년을 지냈으며
이곳에서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500여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조선시대 성리학의 공리 공론적이며 관념론적인 학풍을 실용적인 과학사상으로 이끌고자 하는
실사구시의 실학을 집대성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가족과 헤어져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간적 고뇌와 아픔이 뼈에 사무친 곳이기도 합니다.
다산은 차나무가 많았던 만덕산의 별명으로, 정약용의 호 다산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강진 사의재>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주막집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4년 동안 기거하며
『경세유표(經世遺表)』 등을 집필하고 제자들을 교육하던 곳입니다.
다산은 몸과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어 학문에 전념하기로 다짐하며 사의재란 당호를 붙였습니다.
사의재란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으로,
그 네 가지는 곧 맑은 생각과 엄숙한 용모·과묵한 말씨·신중한 행동을 가리킨다.
즉 맑은 생각은 더욱 맑게,
단정한 용모는 더욱 단정하게,
적은 말은 더욱 적게,
무거운 행동은 더욱 무겁게 하는 것입니다.
사의재는 교육의 공간이기도 하였는데,
주막 할머니의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기르셔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이야기에
1802년 10월경부터 강진읍 6제자에게 스스로 편찬한 『아학편』을 주교재로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다산은 "내가 강진에 귀양오기를 참 잘 했다. 강진이 내 고향 땅이 아니란 말을 이제는 믿지 않으리라"고 할 만큼
지역 현실에 참여하면서 조선 사회의 모순과 병리를 목격한 후의 느낌과
경세(백성이 더 나은 세상의 원칙)에 대한 소망을 담아서
『경세유표』와 『애절양』 등의 저서를 이곳 사의재에서 집필하였습니다.
외로움(Loneliness)에서 고독(Solitude)으로
이렇게 왕성한 저술과 학문연구를 했지만 당시의 외로움과 고독은 그야말로 거대했으니,
"보이는 것은 구름 그림자나 하늘 빛깔 뿐이고, 밤새도록 들리는 것은 벌레 울음소리와 대나무 소리"만 있던 가운데
정약용 선생의 처한 상황은 정말 열악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상도 장기(현재 경상북도 포항지방)에서의 10개월, 그리고 전라도 강진에서의 18년동안의 긴 유배생활,
그 유배생활 가운데 대표적인 선생의 저서인 "목민심서"를 비롯한 총 503권의 역작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정약용 선생님의 이야기를 읽고 보는 저,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2년 반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상당히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정리했습니다.
1년여 전에는 애틋하고도 신뢰관계에 있던 한 사람을 떠나 보냈습니다.
직장업무로 일할 때도 주로 혼자서 일하고, 당시 속해 있던 공동체의 실수로
전 교회 청년부 명단에서도 삭제되어서 소그룹 모임도 못하고 성가대만 했습니다.
(사실 이거 문제 많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교회를 떠난 청년들이 많습니다)
그것도 3주전 인대 파열(염좌)로 속절없이 그것조차 못하게 되면서
거의 집과 가끔 병원을 왔다갔다 하는 것의 반복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저의 벗은 음악과 책이었고,
여기 블로그를 통해서 인사나누는 분들과의 소통, 이 정도였다고 할까요?
그동안 롤 모델이 안 보였는데,
우연히 읽는 책 가운데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요즘 읽었고 또 읽을 책들- 현재 "지금 외롭다면 잘 되고 있는 것이다" 독서중>
주옥같은 책들을 읽으면서 Solitude(고독)에 대하여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전 독신주의자도, 비혼주의자도 아닙니다.
다만 현재의 상황에서 무기력하게 있기는 싫습니다. 책을 읽든지, 글을 쓰든지 그것이 요즘 저의 가장 큰 위로입니다.
이게 블로그니까 이렇게 쓰지, 다른 SNS라든지 이런데는 도저히 쓸 수가 없는 주제이죠^^
암튼 이번을 계기로 블로그 카테고리에 "Solitude"라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이 책들 외에, 개인적으로 느끼는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단상을 가지고 여기 한 번 쭉~ 풀어보렵니다.
그래야 제가 더욱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나만의 블로그 공간으로도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기쁜 것은 제 인생의 또 한 명의 롤모델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 돌아오는 주말에 남양주의 다산 유적지를 둘러봐야 할 것 같습니다~^^
※참고문헌
문순태, 「다산 유배기, 18년간의 강진생활」, 세대 제15권 통권179호, 1977.
문순태, 『다산 정약용』, 큰산, 2003.
신미원, 『답사여행의 길잡이5-전남』, 한국문화유산답사회, 2010.
최선호, 『한국의 미 산책』해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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