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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끄적거림~

"감사"에 깃든 진정성과 폭력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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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라는 말,

사전적 정의로는 "무엇에 대해 고마움을 나타내다"라는 의미로 주로 통용됩니다(위키 백과사전 참고)


오늘 페이스북 친구 가운데 한 목사님께서 "감사의 폭력성"에 대한 글을 올리셔서 

일하다가 쉬는 중에 보고 굉장한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감사의 폭력성(신성관, 안양감리교회 부목사, 성결대학교 일반대학원 신약전공 박사과정중)


1. 얼마 전 서울에서 수요예배 때 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이 있어서 수요예배 설교시간에 강의했다. 

  서울에서 꽤 규모가 큰 교회였고 수요일에도 많은 사람이 모였다.


2. 평소 수요예배 진행에 따라 사회자가 예배 순서를 진행하는데 강의 전 헌금 시간을 약 25분이나 진행했다. 

   그 이유는 헌금 봉투에 담긴 감사의 내용을 일일이 모두 읽어주기 때문이었다.


3. 평상시에 감사의 내용을 읽어주는 것에 큰 반감이 없었던 터라 그냥 듣고 있었는데 그 내용을 들으니 다음과 같았다. 

  “대학 합격 감사”, “사업 잘됨 감사”, “사법고시 합격감사”, “아파트 분양 감사”, “아파트 재개발 감사”


4. 가만히 들으면서 이러한 감사의 내용이 누구에게는 “폭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같은 하나님을 믿는데 왜 나는 이렇게 힘들게 살게 하시고 절망만 주시는가? 의 생각에 고통스러워 할 수 있다.


5. 감사를 자랑하는 이들은 이렇게 쉬운데 왜 복을 못 받느냐는 듯이 자신의 감사 내용을 자랑하며 폭력을 휘두른다. 

  시중에 나와 있는 간증 책은 자신의 축복 비결을 적어 놓고 복 받는 것은 아주 쉽다고 자랑한다. 

  자신은 단순히 십일조의 십 원 단위까지 정확하게 했는데 그냥 수억의 축복을 주셨다는 것이다.


6. 열심히 신앙생활을 이어나가지만, 여전히 꼬리 칸의 삶을 사는 이들은 자신이 축복받지 못한 이유를 자신의 정성 부족을 탓하고 

  기도 부족과 믿음 부족, 헌금 부족, 남편의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이유를 탓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7. 어쩌면 현재 교회는 상처를 치료하고 싸매는 곳이 아니라 상처를 양산해 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또 기도에 매진한다.


8. 이러한 현상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많은 청년이 여전히 자기계발 도서를 붙들고 성공을 위해 자기계발서에 나온 법칙에 따라 아침형 인간도 돼보고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법칙도 따라 해봤지만 

  결국 제자리인 자신의 모습을 통해 상처를 받고 “힐링”이란 주제의 책을 붙들고 사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9. 초기 기독교인들의 감사는 사회에서 자신만 불쑥 솟아 높아짐을 자랑하고 감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신분 자랑을 버리는 것을 자랑하고 이웃과 평등을 감사했다.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었으며 자신이 비천에 처함을 감사했고 고난을 감사했다.


10. 한국 교회의 감사 내용이 자신의 성공 자랑이 아니라 이웃과의 평등을 위해 사회의 정의를 위해 자신의 낮아짐과 비천해짐을 감사 해야 한다. 

   그러면 누구나 자신 있게 감사의 제목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숫자로 하나하나 배열해서 쓴 글이 구구절절 공감을 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감사라는 말의 쓰이는 유래는 아무래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 "범사에 감사하라"는 글이 있습니다.

여기서 "범사"라는 말은 "모든 일에"라는 의미로 볼 수 있겠고

문맥상으로 볼 때 "항상", "쉬지 말고"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감사"란 부분이 자기계발의 부분으로 인식이 된 현실을 보게 됩니다.

"감사일기"를 쓴다고 하지요?

매일 5가지 정도의 감사할 것을 찾아서 그것을 노트에 기록한다는 것,


이것에 대해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 미국의 유명 토크쇼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입니다




오프라윈프리의 삶의 부분이야 워낙 여러가지 형태로 알려졌으니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또 그가 말한 "성공 10계명"도 여기서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오프라윈프리는 "감사일기"를 35년 이상을 노트에 기록했습니다.

처음에는 감사할 것이 없어서 장미꽃에 있는 가시(현실의 비통함)에 대한 감사의 인생이었지만,

그것에서 장미꽃(이미 가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감사의 인생으로 변하게 됩니다.

(여기서 가시와 장미꽃에 대한 감사의 부분은 비유적 표현입니다)

즉 무엇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때, 막힌 다 싶으면 역설적인 감사의 표현을 하면서

감사에 대한 글을 적었다고 합니다.


수많은 자기계발 강사들의 "감사"에 대한 주제 표현 때, 아마 이 오프라윈프리를 분명 언급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다가 "감사"의 부분이 자기계발의 부분으로 인식이 된 것일까요?


앞서 저의 페이스북 친구분(목사님)의 글 가운데서


3. 평상시에 감사의 내용을 읽어주는 것에 큰 반감이 없었던 터라 그냥 듣고 있었는데 그 내용을 들으니 다음과 같았다. 

  “대학 합격 감사”, “사업 잘됨 감사”, “사법고시 합격감사”, “아파트 분양 감사”, “아파트 재개발 감사”

 

무엇을 이루었다는 "성공"의 부분에서 감사가 표현되고 그것이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는

자기자랑식의 감사가 된다면?

굉장히 불편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지혜로운 감사란 것은 먼저 큰 것을 감사하기 보다 작은 것을 감사하는 것이고,

그 작은 감사가 순간순간, 그리고 날마다 감사하는 것으로 습관화되는 진정성있는 감사가 맞지 않을까요?


그리고 지금의 현실,




현재의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감사에 대한 표현의 부분은 지혜롭고 먼저 남을 배려하는 감사의 표현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개인의 한계가 있는 생각입니다. 저보다 더 좋은 담론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분명 계실 것이고)


그리고 억지로 감사를 강요하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본인 스스로 내재적으로 깊이 느끼는 감사의 과정들이 중요할 터인데,

어쩌면 저도 그럴 수 있고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도 있을 수 있는 것은,

도움을 받아야 하고 위로를 받아야 하는 이웃에게

"당신이 받은 감사의 부분들을 생각해 보세요"이렇게 말만 하고 만다면?

왜냐? 제가 이런 피드백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의 저에게는 직접적인 위로와 보다 말을 들어주고 이해해주는 경청과 공감의 부분이 더 절실했는데,

그러한 경청과 공감이 없이 제게 "감사 과제"를 내주는 일명 영혼없는 멘토가 계셨거든요.

(물론 그 분은 지금 저와 연락하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감사의 폭력성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영향력이 지금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 프랭클린 플래너의 Weekly Compass에서는 그 경험을 한 이후부터 

항상 경청과 공감에 대한 다짐이 들어 있습니다.

(얼마나 크게 데였다고 생각하면 이럴까요)


절대 다른 이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의 부분에서 먼저 경청하고 공감하겠다는,

그래서 따뜻한 커뮤니케이션을 이루는 것,

그로 인해 함께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성이 있는 감사이고 감사를 더 퍼트리게 하는 것 아닐까요?


감사를 하더라도 진정성이 있게 감사를 하고 싶습니다.

그 "진정성", 여전히 지금도 찾고 있고 배우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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