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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land&Suomi

핀란드의 비폭력 저항운동(1) 톨스토이식 저항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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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헬싱키에 있는 우스펜스키 성당>


핀란드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19세기에 러시아 건축가 알렉세이 고르노스타예프(Aleksei Gornostaev)가 설계했다. 

1868년 성모 승천 축일을 맞이해 완성되었으며,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가장 큰 정교회 건물로 알려져 있다. 

성당 내부에는 그리스도와 12사도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1809년에서 1917년까지의 당시 제정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핀란드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현실이었습니다.

특히 19세기 말의 러시아의 민족주의자들은 당시 자치대공국으로 존재해온 핀란드, 그리고 다른 변방지역의 국가들에 대해

러시아화를 요구합니다. (이를 테면 대한제국의 일제에 의한 한일합방의 치욕적인 역사처럼 말이죠)



1898년 제정러시아의 핀란드 총독으로 부임한 보브리코프(N.I.Bobrikov)는 당시의 핀란드 사람들이 마음속에 키워 오던

입헌주의와 분리주의를 당장 발본 색원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보브리코프는

핀란드를 행정적, 문화적으로 제정러시아에 동화시키기 위한 세부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이것이 그 당시에는 당연히 핀란드 헌법에도 어긋나고 핀란드를 죽이는 쿠데타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P.S : 저 사진을 보면서 저에게는 이토 히로부미가 연상되는군요


이때 핀란드인들의 저항운동의 수단은 효과적이면서도 계몽적이었고

그 기본정신은 체계적으로 협력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의 저항은 "방어"의 개념이었고, 투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비군사적 전쟁"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서 핀란드가 택한 전술은 톨스토이식 투쟁방법(자발적 예속)입니다.

당시 핀란드 총독에 의해 자행된 부당하고 불법적인 폭력적 행위에 대해서 협조와 복종, 그리고 인정을 거부합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폭력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비폭력적인 사회권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었고, 이것이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당시의 지배세력들이 궁극적으로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도록 하게 되는 것입니다.


편집자주 : 물론 그렇다고 우리 한국의 역사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잘못되었다고 하는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한 항일무장투쟁이 우리의 독립에 비추어볼 때 정말 큰 역할을 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톨스토이식의 저항운동은 이렇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확고하고 강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정의감을 알리지 못한다면, 그리고 복종하기를 거부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억압받는 고통에 대해 오로지 자신들을 탓하는 수밖에 없다"

이 개념을 원용(이용)한 것입니다.


얼마나 처절한 현실일까요. 행동하지 않으면 그 이후의 억압받는 고통에 대해서 자신들을 탓할 수 밖에 없다는 이 논리,

그런데 여기서 "행동"이란 차원이 비폭력적 저항운동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시간도 대한민국의 국회의사당에서는 합법적인 의사방해수단인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의 5시간 33분

국민의당 문병호 의원의 1시간 49분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의원의 10시간 18분

정의당 박원석 의원의 9시간 29분


그리고 24일 밤 11시 30분 현재 

더불어민주당 유승희 의원의 필리버스터가 진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이들의 비폭력 저항운동에 응원을 보냅니다.

앞서 톨스토이의 저항운동의 핵심을 이들이 계승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참고서적 : 핀란드가 말하는 핀란드 경쟁력 100(비아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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