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선생은 1794년 음력 10월 말~11월 15일까지
보름의 시간동안 암행어사 임무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습니다
네 개 고을(경기도 적성, 마전, 연천, 삭녕)의 당시 피폐한 농촌을 보면서
다산의 마음에 자리잡힌 생각은
"이런 상태로 두어서야 나라가 되겠는가"
"이러다가는 나라가 결국 망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이 생각에 사로잡히고 새로운 소명감에 두 손을 불끈 쥐게 됩니다
특히 전 연천현감 김양직, 전 삭녕군수 강명길의 엄청난 비리를 밝혀내지만,
당시 이들이 임금(정조)의 최측근이란 이유로 불문에 부친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의분에 떨면서 상소문을 올리게 되는데
이 상소문을 통하여 다산의 생애 가운데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통치 철학과 경세 논리를 얻어낼 수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 1762~1836>
이 때 다산이 가장 마음속에 깨닫고 기억했던 논리는
1. 법권을 제대로 적용받지 않는 특권층이 존재하는 한, 세상이 바르게 갈 수 없다는 원리
2. 법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야 한다는 진리
이 두 가지의 원칙이 그의 일생동안의 원칙이 되었습니다
그의 최고의 저서 3권(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은
바로 그런 통치 철학과 경세 논리의 구현을 위해서 제작된 책이기도 했습니다
<남양주 다산유적지에 있는 다산의 저술목록, 주요3권과 자찬 묘지명이 제일 크게 보입니다>
<다산유적지에 있는 주요3권 자료>
앞서 다산의 상소문과 여기 주요3권을 통해서 분명하게 언급된 민생과 국법의 중함에 대한 다산의 논리는
1. 민생만 중요하게 여기다보면 법의 권위가 약화될 수 있고, 국법만 한없이 높이다보면 반대로 민생이 파탄날 수 있는 구조를 인식,
2. 그리하여 탐관오리로 인해 파탄난 민생과 국법을 동시에 살리는 길은, 탐관오리를 엄정 처리하고, 재산을 확실히 몰수해서
민생에 도움도 주고 법의 권위도 세우는 것이 중요,
이 주장은 다산의 정치적, 경제적인 철학과 애민사상을 궤뚫는 다산의 평생의 원칙 중, 중요한 하나의 축이었습니다.
물론 이 원칙으로 인해 서용보(1757~1824)라는 인물과 껄끄럽고 어려운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가치중심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간 다산 정약용선생은
180여년이 지난 오늘날도 여전히 한국의 역사 가운데서 두드러진 실천적 학자로 일컬음을 받고 있습니다.
<살충제 달걀파동>
<한빛 원전>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
<아직도 5명의 세월호 미수습자가 있는 현실의 비극>
그리고 더욱 많은 지혜와 결단이 필요한 이슈들........
다산 정약용 선생께선 오늘날의 한국의 모습을 보시고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망가질데로 망가져있는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시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말씀을 해 주실까요
오늘은 다산 선생이 더욱 생각나고 그리워지는 시간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책을 읽었다면 더욱 그럴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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