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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리영희 평전" 그리고 198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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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의 '한 알의 밀'의 역할까지 포함하여,
민주세력의 희생과 투쟁으로 
1987년 6월 항쟁의 거센 불길이 타올랐다.

그 과정에는 
<민중교육지> 사건,
서울 미 문화원 점거농성,
구로 동맹파업,
삼민투위 사건,
주한 미 상공회의소 점거농성,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농성,
KBS시청료 거부운동,
개헌서명운동,
서울대 졸업식장 집단퇴장사건,
구국학생연맹 사건,
박영진,이재호,김세진 분신
인천 5.3항쟁
교육민주화선언,
서울노동운동연합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제헌의회그룹 사건,
<말>지 기자 구속사건,
서울대 대자보 사건,
전국노동자연맹추진위 사건,
건국대 점거농성,
안산 노동자해방투쟁위원회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노동자 해방연구회 사건,
<한국민중사> 사건,
서울 택시기사 연대파업,
남노련 사건,
이한열 최루탄 피격사건 등이 
6월 민중항쟁의 불씨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학생, 노동자들이 
투옥, 분신, 투신, 성고문, 물고문등으로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장엄한 6월항쟁은 이들의 희생으로 가능했다.



리영희는 각성된 민중의 힘으로 군부독재자가
백기를 든 사태를 지켜보면서 
"전환시대"의 지식인으로서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4월혁명에서 "1인분의 역할"을 자부했던 리영희는
6월항쟁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별로 내세우지 않았다.
자신의 글을 읽고 '의식화'된 청년학도들에게
그 몫을 돌린 것이다.

-리영희 평전
11. 6월항쟁과 <한겨레> 그리고 방북취재기획
우파의 '부패'와 좌파의 '분열'에 일침을 놓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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